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폭싹 속았수다 - 제주 방언처럼 낯설고 따뜻하다

by 레아벨라 2025. 6. 14.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 POSTER

1. 낯선 듯 정겨운 제목이 말하는 첫 감점

드라마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을 것이다. “폭싹 속았어요? 이게 무슨 말이야?” 하지만 뜻을 알게 되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제주도 방언으로 ‘완전히 속았다’는 의미를 지닌 이 말은, 단순한 사기나 거짓의 표현을 넘어선다. 누군가를 철석같이 믿었고, 그래서 더 아팠고, 그럼에도 결국엔 웃을 수 있었다는 인생의 역설을 품은 말. 바로 그게 ‘폭싹 속았어요’다.

이 드라마는 단순한 사기극도, 복수극도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깝다. 속았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속았던 시간을 얼마나 순수하게 믿었는지, 그리고 그 상처를 품고 얼마나 뜨겁게 살아내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2. 찰떡같은 캐스팅 : 인물들만 봐도 심장이 '폭싹'

특별한 이유는 캐스팅만 봐도 감정이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주인공 ‘정철’ 역에는 박보검이, 그리고 ‘해녀 순옥’ 역에는 김태리가 등장한다. 처음엔 과연 이 두 배우가 제주 배경의 이질적인 방언과 감정을 잘 풀어낼 수 있을까 싶었지만, 정말 ‘폭싹’ 속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완벽한 몰입도를 보여준다. 박보검은 기존의 도시적이고 반듯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바보 같은 순정남’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고, 김태리는 억척스러운 해녀의 삶을 거칠게 살아내면서도, 눈빛 하나로 ‘사랑’을 표현해 낸다. 둘의 케미는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서, ‘서로의 인생을 감싸 안는 관계’로 발전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제주 바닷가 작은 마을을 걷는 느낌을 주게 만든다.

3. 줄거리 : 거짓에서 시작된 진심, 그 끝에 남은 것은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서울에서 모든 걸 잃고 제주도로 내려온 한 남자 ‘정철’과, 바다와 함께 살아온 한 여자 ‘순옥’의 만남. 정철은 서울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누군가의 거짓말에 ‘폭싹’ 속아 인생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그런 그가 제주에서 만난 순옥은, 말투도 거칠고, 인생도 전투적이지만 묘하게 끌리는 인물이다. 정철은 처음엔 순옥을 이용하려다 점점 진심을 다하게 되고, 순옥 또한 그에게 마음을 열면서도 과거의 한 사건으로 인해 그를 밀어내고 만다. 결국 둘은 서로에게 가장 진실한 위로가 되지만, 그 과정엔 ‘폭싹 속았던’ 수많은 장면들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속임수는, 결국 한 가지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사랑이었다.

4. 대한민국의 영원한 휴식처 제주라는 무대 : 풍경이 아니라 감정의 배경이 되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은 ‘제주’다. 단순한 배경이 아닌, 감정의 매개체로 제주를 활용한다.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검은 현무암의 절벽, 습기 머금은 돌담길, 그리고 해 질 무렵의 노을빛 감귤밭. 모든 장면이 ‘감정의 풍경화’처럼 표현된다.

순옥이 바다에 잠수할 때, 그 숨소리조차 들릴 것 같고, 정철이 읍내를 걷는 장면에선 관객도 함께 바람을 맞으며 걷는 듯한 착각이 든다. 방언도 포인트다. 처음엔 자막 없으면 못 알아듣겠다 싶지만, 3화쯤 지나면 오히려 그 낯선 말들이 더 진하게 다가온다.

5. OST  : 귓가에 남는 건 제주도의 바람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다 보고 나면, 이상하게 멜로디 하나가 머릿속에 남는다.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 소리에, 제주 사투리를 살짝 녹인 가사. 메인 테마곡 ‘그 바다, 그대’는 정철과 순옥의 감정을 그대로 옮긴 듯한 곡이다. “폭싹 속았어요, 그대라는 바다에…”라는 가사는 시청자들에게도 마법처럼 들려온다.

이 곡은 드라마의 흐름과 맞물려 울컥하는 장면마다 흘러나오며 감정을 배가시킨다. 특히 10화 엔딩에서 정철이 순옥에게 처음으로 “고마워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OST와 함께 영원히 기억에 남는다.

6. 인생, 결국은 '폭싹 속았어요'처럼 살아가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믿고, 실망하고, 다시 또 믿는다. 속았다는 사실에 상처받기도 하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조금 더 어른이 되고,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된다. 이 드라마는 바로 그 이야기다. “폭싹 속았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좋았어요.” 이 말을 웃으며 할 수 있게 되는 순간까지, 드라마는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시청자의 옆에 선다. 다 보고 나면, 이렇게 중얼거리게 된다. “아, 나 이 드라마한테도 폭싹 속았구나.” 그리고 그 속임수는, 아주 기분 좋은 사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