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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 시즌1 다시보기 : 가면 속의 진실과 우리가 외면한 현실

by 레아벨라 2025. 7. 5.

오징어게임 시즌1 poster
오징어게임 시즌1

오징어게임을 다시 본다는 것은 단순한 복습이 아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 오징어게임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던 인물들의 표정, 무심코 지나쳤던 대사, 잔혹함 속에 숨겨진 슬픔과 냉소.

후속이 발표되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후속작품에서 재미를 찾기보다는 우리의 인생을 찾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피 튀기는 서바이벌이 아닌, 우리네 인생을 보여주는 실화"이다.

 

오징어게임은 왜 세계를 사로잡았을까?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플랫폼에서, 그것도 한국어로 된 드라마가 세계 1위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징어게임》은 해냈다. 그것도 단순한 ‘흥미진진한 게임’이나 ‘잔혹한 서바이벌’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드라마가 보여준 것은 우리 사회의 단면이자, 자본주의 끝에 몰린 인간의 민낯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콘셉트로 보인다. 빚더미에 앉은 사람들이 거액의 상금을 걸고 목숨을 건 게임에 참가한다. 하지만 이 단순한 구조 속에 숨겨진 '계층 이동의 환상'이 글로벌 시청자들을 자극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현실에서 실패한 사람들이며, 그 실패에는 단순한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사회적 배경과 구조적 문제가 깔려 있다. 게임은 단순히 ‘운’이나 ‘지능’의 싸움이 아니라, 신뢰와 배신, 공동체와 이기심이 뒤섞인 심리전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시청자들은 자신을 투영하게 된다.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내 친구를 밀어야 살아남는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이 질문은 비단 드라마 속 허구에 머물지 않는다. 서사 구조도 심플하지만 강력하다. 서민 → 부채 → 생존 → 희생 → 무기력 → 진실. 이 흐름은 단지 기훈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현실 속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는 인생의 궤적이기도 하다. ‘한국판 배틀로열’이라 불리며 전 세계인이 주목한 이유는 단순한 자극이 아니라, 그 자극 안에 숨겨진 정교한 서사와 슬픈 인간성의 회복 불가능성에 있다. 결국, 《오징어게임》이 신드롬이 된 진짜 이유는 이거다. 우리 모두가 그 안의 누군가였고 누군가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로 본 우리 사회의 축소판

《오징어게임》 속 인물들은 너무도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우리가 평소에 무심코 스쳐 지나갔던 얼굴들이다. 누군가의 아빠, 누군가의 이웃, 그리고 나 자신일 수도 있는 사람들. 이 드라마가 주목받은 이유는 단지 이야기의 긴장감 때문이 아니라, 그 인물들이 현실의 단면을 너무도 정직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성기훈’은 모든 걸 잃은 한 남자다. 사업 실패, 도박 중독, 이혼, 딸과의 단절.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악인이 아니다. 무능하고 비겁하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인간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기고 싶어 한다기보다, 무언가를 되찾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조상우’는 서울대 출신에 똑똑하고 계획적인 인물이다. 처음엔 믿음직스러워 보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냉정하고 잔혹한 면모를 드러낸다. 그는 현실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무섭다. ‘강새벽’은 말수가 적은 탈북자 소녀다. 가족을 위해 모든 걸 건 그녀의 눈빛은 침묵 그 자체로 서사를 끌고 간다. 새벽은 소외된 청년 세대이자,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그늘’을 대표한다. ‘알리’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이지 않는 존재, 이주노동자다. 그의 선함은 오히려 그를 죽음으로 이끈다. 그의 최후는 시청자에게 묻는다. “착한 사람은 왜 늘 가장 먼저 사라지는가?” ‘오일남’은 모두가 동정한 노인이었지만, 사실은 이 모든 게임의 설계자였다. 그의 존재는 우리가 믿고 의지한 인간성조차도 환상일 수 있다는 냉혹한 진실을 던진다. 이들을 다시 보면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의 보고서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만약 내가 저 안에 있었다면, 나는 누구였을까? 그리고 누구를 믿었을까?”

가면과 게임: 익명성의 폭력성은 어디까지?

빨간 점프슈트를 입고 가면을 쓴 운영자들, 얼굴 없는 VIP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각적 장치는 바로 이 ‘가면’이다. 하지만 가면은 단지 디자인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이 드라마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인 ‘익명성’을 상징한다. 가면을 쓴 사람은 책임지지 않는다. 운영자들은 참가자들을 사살하면서도 한 점의 죄책감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이 설정은 마치 인터넷 세상, 또는 기업과 조직에서의 익명성 구조를 닮았다. “사람을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부르면, 그 존재가 가벼워진다.” 이 대사는 드라마 속 현실을 꿰뚫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의 조직문화, 학교, SNS, 기업 구조까지 떠올리게 한다. 익명성은 책임을 흐리게 하고, 감정을 제거하고, 인간을 기계처럼 만든다. VIP들의 존재는 현실에서의 ‘관전자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직접 나서지 않지만, 돈을 걸고 사람들의 고통을 관람한다. 이 모습은 현실에서 자극적인 콘텐츠를 소비하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놀라운 점은 이 익명성과 폭력성이 절대 비현실적인 판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가면을 쓰고 산다. 그리고 그 가면 뒤에서 우리는 때로는 더 공격적이고, 더 무관심해진다. 《오징어게임》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나요?” 이 질문이야말로 이 작품이 남긴 가장 섬뜩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오징어게임이 남긴 메시지와 여운

드라마의 마지막, 성기훈은 상금을 얻는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웃지 않는다. 그가 돌아간 집엔 어머니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내면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이 장면은 결코 단순한 ‘엔딩’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본주의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이 드라마는 게임의 잔혹함만큼이나, 게임 밖의 현실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는 돈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리고 끝내, 그 돈을 쓰지 못한다. 왜냐하면 진짜 중요한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항상 구경하고, 누군가는 뛰고 있다’는 대사는 계급 사회의 축약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뛰는 쪽에 속한다. 이 드라마는 절망의 게임이지만, 그 안에 아주 희미하게 선택의 가능성을 남긴다. 기훈은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 그 선택은 단지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무언가를 바꿔보겠다”는 결의의 상징이다. 《오징어게임》은 끝나도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계속 살아가는 한, 이 게임은 반복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특별한 이유는, 그 무기력 속에서 작은 인간성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새벽이 알리에게, 기훈이 할아버지에게, 새벽이 지영에게 건넨 작은 온기. 그 순간들만이 이 드라마의 유일한 구원이다.

2025년 지금, 다시 오징어게임을 본다면

2021년엔 충격이었다. 하지만 2025년의 지금, 《오징어게임》을 다시 보면 느낌이 다르다. 그때는 팬데믹과 실업, 불확실성 속에서 봤고, 지금은 AI와 고립, 격차 사회의 공고화 속에서 다시 본다. 그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공통된 질문이 남는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질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잔혹해진다. 2025년의 청년들은 불안한 미래 속에서, 중장년층은 무너진 자산과 기대 속에서, 노년층은 고독과 병든 사회로부터 거리를 두며 살아간다. 이 모든 계층이 《오징어게임》 속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이제 우리는 시즌2를 기다린다. 기훈은 다시 돌아간다고 했다. 그가 이번에는 어떤 선택을 할까? 그는 변할까, 아니면 다시 무너질까? 이 질문은 곧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오징어게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거울이다. 다시 보면, 그 안에 피와 눈물, 그리고 내가 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건, 그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순한 생존 게임이 아니다.

우리가 외면한 사회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준 작품이었다.

다시 보면서 느낀 건 인간의 욕망과 상처,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두운 자신의 그림자는 언제 어디서나 불쑥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것이 무서웠다.